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진코믹스 차단 사건의 교훈

by | Mar 27, 2015 | 오픈블로그, 표현의 자유 | 0 comments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진코믹스 차단 사건의 교훈

글 | 오픈넷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레진코믹스 차단 사건(이하 ‘레진코믹스 사건’)은 대한민국 통신심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레진코믹스 사건은 크게 아래 네 가지 점에서 방심위의 결함을 드러냈다. 절차는 오간데 없고, 판단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으며, 백보 양해해 그 판단이 옳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썼다.

  • 당사자(레진코믹스)에 대한 사전통지 절차 위반
  • 당사자의 의견진술 기회 부여 절차 위반
  • 명확한 기준 없는 사이트 전체 차단
  • 행정기관의 음란정보 판단의 불명확성

레진코믹스 사건에서 드러난 방심위의 문제점을 일단 정리해보자.

레진코믹스

 

0. 레진코믹스 전격 차단과 철회 

우선 사실관계를 짚고 넘어가자.

방심위는 2015년 3월 24일 웹툰 플랫폼 사이트인 레진코믹스를 차단했다(2015년 3월 24일 제22차 통신심의소위원회). 법적 근거는 음란정보를 유통했다는 이유였다.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7 1항 1호)

그러나 3월 26일 오후, 음란성 없는 웹툰 역시 레진코믹스에서 많이 유통되는 점을 확인하였고, 사이트 전체 차단은 문제라고 판단한다며 방심위는 스스로 시정요구를 철회했다. (2015년 3월 26일 제23차 통신심의소위원회)

 

1. 사전 통지? 의견 진술 기회? 그게 뭐예요? 

방심위는 레진코믹스 사이트 전체를 ‘셧다운’ 해버리기 전에 레진 측에 사전 통지와 의견 진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방심위는 레진코믹스가 서버를 이용하는 해외 인터넷 망사업자들에게만 차단을 통지했을 뿐이다. 행정처분을 하려면 당사자에게 사전 통지하고, 의견 진술할 기회를 주는 건 당연한 원칙이다.

이는 상식과 원칙일 뿐만 아니라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25조 2항에 명시된 명문화한 규정이다. 이 절차는 방심위의 과잉 규제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다. 하지만 방심위는 이를 무시했다. 왜 그랬을까?

방심위는 ‘음란물 등 불법성이 명백한 정보’에 관해서는 정보주체(게시자 등)에게 통지가 불필요하다고 관련 규정을 해석한다. 즉, 조항을 자의적으로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면서 법에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만약에 레진 측에 상식과 법규정의 취지에 부합하게 사전 통지하고, 협의했다면? 사이트 전체를 차단하고, 또 이를 부랴부랴 철회하는 어처구니 없는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절차가 존재하다고 하더라도, ‘불법성’을 방심위가 임의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절차를 위반하면,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studiobeerhorst}-bbmarie, “you are not listening”, CC BY http://www.flickr.com/photos/74782490@N00/6268874114/in/photolist-axXBSs-CVQtm-bFjZpF-5VYr2A-aeLwXq-9dTZK6-T2ZS1-dAdPGQ-5cFGhQ-7DsjCB-9JTPd8-7c3sB9-8uNQYG-4EKN56-4EKMSn-4EQ4TA-6TwFT9-6TsF44-6TwFRj-6TwG1A-5S1iMM-hFg6hM-dcM567-9nKTEV-9p1DpF-9nKUvp-58HCnh-bemMJr-c6ubSY-thZNG-9YBZDW-a7xB3U-7P5iup-3tEqDH-a9pQXt-5wHMjW-5wDrfa-5yrg9E-9u3eAa-itAH4-9kwa5m-daDCa7-dgr5iu-a8p2go-7a6Ttj-7c3xNm-7UZzhw-7UZznm-2eTYH-9nKUcn-aUQzSc

{studiobeerhorst}-bbmarie, “you are not listening”, CC BY

 

2. 소 잡는 칼로 닭 잡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다 

한 사이트 내에는 여러 개의 정보가 있다. 사이트 규모가 클수록 불법 정보와 합법 정보는 혼재돼 있기 마련이다. 방심위는 사이트 내에 불법정보가 다수인 경우 현실적으로 이를 일일이 선별해 시정요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이트 전체를 차단해왔다.

이런 행정편의적 관행으로 그동안 선량한 합법 정보 이용자의  권리는 침해될 수밖에 없었다. 방심위 내부에서도 과잉 제재 우려 때문에 전체 게시물을 조사해 불법정보가 70% 이상인 경우에만 전체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도록 내부기준을 수립했지만, 기준만 세웠을 뿐, 이를 엄격히 지키지 않는 형편이다.

레진코믹스 사건에서도 방심위가 스스로 세운 내부 기준만 지켰더라도 레진코믹스 전체를 차단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레진코믹스 사건은 결국, 행정편의주의와 졸속 심의, 과잉 제재라는 최악의 삼박자가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인 셈이다.

방심위가 벌인 경솔한 과잉 ‘진압’은 이용자의 이용권과 사업자의 영업권 침해라는 부당한 희생을 동반한다.

Daniel Lobo, CC BY https://flic.kr/p/5925ri

일단 때려잡자? (출처: Daniel Lobo, CC BY)

 

3. 방심위의 ‘음란성’ 판단 기준, 과연 합리적인가  

판례는 ‘음란’ 개념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통념상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으로서, 표현물을 전체적으로 관찰·평가해 볼 때 단순히 저속하다거나 문란한 느낌을 준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존중·보호되어야 할 인격을 갖춘 존재인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방법에 의하여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 또는 묘사한 것으로서, 사회통념에 비추어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고 하등의 문학적·예술적·사상적·과학적·의학적·교육적 가치를 지니지 아니하는 것을 뜻한다”

– 대법원 2008년 3월 13일 선고, 2006도3558 판결 중에서

법원은 “문란한 느낌을 준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왜곡”할 정도로 “노골적인 방법에 의한 성적 부위에 대한 표현 또는 묘사”를 음란성이 성립할 수 있는 개념 필요적 요소라 말한다.

하지만 방심위는 관행적으로 ‘성행위 묘사’ 혹은 ‘성기 노출’이 있는 때에는 바로 음란성 정보로 분류한다. 판례의 음란 기준을 따르지 않고, 더 넓게 음란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헌재 방통심

대법원 판결과 헌재 판결을 뛰어넘어 판단하는 방심위?

최근 헌재 판결은 방심위가 심의할 수 있는 대상 정보를 이렇게 설시한다.

“정보통신망법 조항들에 의해 금지되거나 규제되는 정보 내지 이와 유사한 정보”

– 헌법재판소, 2012.2.23. 2011헌가13

즉,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따르면 방심위는 불법 정보만을 삭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다. 그런데 행정기관인 방심위가 판례보다 더 넓게 음란 개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음란에 도달하지 않은 정보, 즉 불법이 아닌 정보까지 삭제, 차단하는 건 성인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위법한 처분이다.

대법원이 ‘음란성’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선 “하등의 사상적 예술적 가치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진코믹스에 담긴 정보는 웹툰이다. 웹툰 작품 일부에서 성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여도 미술적 표현과 전후 스토리가 공존한다.

하등 예술의 가치가 없는, 전면적으로 차단해야 하는 ‘불법 음란물’이 사이트 전체 컨텐츠의 70%를 넘어서야 사이트 전면 차단의 방심위 논리가 성립한다. 결국 레진코믹스 이용자들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레진코믹스에 수록된 작품의 음란성이 아니라 방심위의 권위적이고, 위압적이며, 스스로 세운 기준도 지키지 못하는 성급하고, 자의적인 검열 행태다.

검열

Skye Inominatus, CC BY NC ND

 

레진코믹스 사건, 아직 끝이 아니다 

레진코믹스는 많은 이용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다. 그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문제를 파악해 방심위는 자신의 시정요구를 다시 시정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건전한 통신윤리의 함양’이라는 추상적인 심의 기준과 행정 편의적 관행은 레진코믹스 사건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사라지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레진코믹스 사이트 자체에 대한 방심위의 잘못된 시정요구와 행정처분은 철회되었다. 하지만 레진코믹스 사이트 메뉴나 개별 웹툰에 대한 차단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레진코믹스뿐 아니다. 무수히 많은 정보들이 ‘심의위원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인터넷에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웹툰 작가가 아니라도 컨텐츠 사업자가 아니라도, 이미 방심위의 ‘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생선 신세다. 여기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다.

레진코믹스 사건의 교훈은 이렇게 단순하고, 명백하다.

 

* 위 글은 슬로우뉴스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2015. 0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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