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공유의 자유

by | Oct 30, 2014 | 오픈블로그, 혁신과 규제 | 0 comments

자본주의의 문제는 교환(공유)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독점에서 온다. 경제가 안 좋아 가망성 없는 자영업이나 힘든 비정규직으로 생존하는 분들은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가계를 버텨내야 할 상황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집에 차가 한 대 있다면 주변에 사정이 조금 더 나은 친구나 친지들을 태워주고 저렴한 수고비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사적 자원의 공유를 아예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과연 자본주의 교정의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필자가 추진하고 있는 공익소송 중의 하나는 자신의 휴대폰을 타인에게 대여해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한 헌법소원이다(전기통신사업법 제30조). 이 법은 노골적으로 통신사들의 매출감소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전화회선을 개통해서 타인과 ‘공유’하면 그만큼 통신사들의 매출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조항을 중심으로 한 법체계 하에서 이통사들의 주민번호수집이 허용되어 법에도 없는 ‘휴대폰 실명제’가 실시되고 있다. 공중에 떠다니는 휴대폰 전파에는 모두 주민등록번호가 하나씩 붙어다니게 되어 감청의 위험이 가중된다. 전 세계 휴대폰의 60%가 감시 없고 가입간편하고 요금저렴한 선불폰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선불폰이 발붙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게다가 휴대폰 실명제 때문에 성인물 실명제나 게임 실명제도 유지가 되고 있어 한국의 능력있는 개발자들의 ‘스타트업’ 기회를 막고 있다.

사회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법을 만들면 이렇게 의도치 않은 해악이 줄줄이 발생한다. 필자는 중요한 사회통합원리를 ‘연대’와 ‘정의’라고 보지만, 연대가 그 연대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할 때는 ‘정의’가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김성태 의원이 택시기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소위 ‘우버 금지법’을 발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자신의 자동차에 돈 받고 타인을 태워주지 못한다는 법이 있다(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제81조). 외국의 각 시로부터 운영권을 받은 택시회사들의 로비에 의해 시조례들에 제정된 경범죄들은 있지만 이렇게 형사처벌을 동반한 중앙정부법은 유일하지 않을지. “업”으로 하지 않아도 타인을 태워주고 기름값이라도 조금 받는 걸 단 한번을 해도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연대와 정의의 균형을 잡을 때 중요한 요소는 개인의 헌법상 기본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발의안은 유상운수의 알선 마저도 금지하려 하고 있다. 오직 ‘우버’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수요자와 공급자가 서로 연락하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 알선에 해당할까? 학생들과 원룸주인들이 공실정보를 교환하는 카페의 운영자도 부동산중개인 자격이 있어야 하나? 어찌되었든 자원공유를 업으로 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막기 위해 운수“업”을 허가제로 할 수 있다. 심지어 운수업의 특성상 숫자제한을 하는 것도 헌법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인구밀도 대비 어느 숫자를 넘어서면 택시가 더 있는 것은 불필요해지고 도로위에서 경쟁이 생기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알선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경제적 약자들이 자원을 공유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할 자유를 위협한다. 최근 동료학생들을 인터넷으로 모집해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통학버스 노선을 만든 대학생도 처벌되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발의안만큼은 택시기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시회사들을 위한 것이다. 택시기사들은 일반인들로부터 콜을 받듯이 우버로부터도 콜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 않는다.

우버가 진정한 공유경제인가 영업행태는 윤리적인가 자본주의의 대안인가 심화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이렇게 법으로 특정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실험과 논의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은 논쟁의 어느 당사자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추진하는 또 하나의 공익소송은 변호사시험법의 합격자 숫자제한을 철폐하는 것이다. 이익집단을 위해 법적 지식과 재능의 공유를 과도하게 막기 때문인데 이 법이 초래한 사회적 폐해는 말도 꺼내기 싫을 정도로 많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 게재했습니다. (201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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