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자들이 더 이상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유통자(intermediary)의 역할만 하게 해야”
“인터넷이 각광받는 것은 정보유통자들의 대량정보처리 때문이다. 대량정보처리 행위를 근거로 정보유통자들에게 민사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인터넷을 죽이는 일이다.”
8월 7, 8일 양일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온라인 정보유통자의 책임’을 주제로 한 국제워크샵이 열렸다. 유럽사법재판소가 최근 내놓은 소위 ‘잊혀질 권리’에 대한 판결을 계기로 검색엔진 등 온라인정보유통자의 책임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토의하는 자리였다. 미국(조나단 지트레인, 어스 가서)과 독일(볼프강 슐츠), 인도(친마이 아룬), 브라질(줄리아나 놀라스코), 태국(피롱그롱 라마수타) 등 세계 각국의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당시 한국 상황을 공유하며 발제한 내용을 토대로 올바른 정보유통자의 책임 및 소위 ‘잊혀질 권리’문제의 해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2는 겉으로는 상식적으로 보인다. ‘특정 정보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침해 당한 사람은 삭제 및 차단을 요청할 수 있고,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는 그 정보를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업체들에게는 동기의 불균형이 작동한다. 하나의 정보를 유지하기보다는 삭제해야 할 동기가 더 크다. 정보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서 받게 되는 법적·윤리적 공격보다는 그 정보를 유지함으로써 당하는 공격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조항이 인터넷 업체들로 하여금 합법적인 정보에 대해 ‘사적 검열’을 하도록 한다.
특히 우리나라 법은 동기의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제44조의2 제4항은 ‘권리침해 여부를 알기 어렵거나 분쟁이 예상되는 경우, 서비스제공자는 한시적으로 그 정보를 차단할 수 있다(임시조치)’는 내용으로 사업자가 정보를 삭제·차단할 때 발생하는 부담을 더욱 줄여주기 때문이다. 또 ‘방송통신위원회설치법’ 제21조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건전한 통신윤리 함양’을 위해 ‘정보를 삭제·차단하라’는 시정요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역시 서비스제공자가 정부의 삭제·차단을 받아들였을 경우 당면하게 될 비난을 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조항이 합법적인 정보의 삭제·차단을 완전히 면책시켜 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서비스제공자들에 의해 삭제·차단 당하는 합법적인 정보들은 엄청나게 많다.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동기의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불법정보는 삭제해야 한다’는 조항에 맞서는 ‘합법정보는 복원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사업자들은 이중고에 처하게 될 것이며 사업을 접는 사업자가 속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 저작권법상의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동기의 불균형’ 문제는 정보유통자들에게 재판관의 역할을 부과하면서 발생한다. 정보유통자들은 스스로에게 재판관의 역할이 부여됐음을 인지하는 순간, 책임을 피하기 위해 리스크가 적은 쪽, 즉 정보삭제를 택할 것이다. 미국 저작권법은 대신 다음과 같은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누군가 권리침해를 주장하면 무조건(합법적인 정보라도!) 우선 관련 정보를 내려주도록 하고 게시자가 그 정보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면 (불법적인 정보라도!) 그 정보를 다시 복원해주도록 한다. 이때 이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경우 양쪽 모두에 면책을 주는 것이다. 즉, 사업자들이 더 이상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유통자(intermediary)의 역할만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침해 주장자의 입장을 게시자에게 전달하고 다시 게시자의 입장을 침해주장자에게 전달하는, 그야말로 진실로 ‘중개자’ 또는 ‘유통자’의 역할만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놀라운 효과가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정보유통자들은 이 면책을 얻기 위해 충실하게 위 조건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90% 이상의 삭제 및 차단요청 대상 정보들에 대해서 게시자들이 복원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콘텐츠의 합법성 및 불법성에 대해 정보유통자들이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상황에서 90% 이상의 콘텐츠들이 암묵적인 합의하에 삭제 및 차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글 스페인에 대한 유럽사법재판소의 최근 결정은 정보유통자 책임에 대한 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은 합법정보를 검색 결과에 포함시킨 구글에 대해 책임을 부과한다.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non-prejudicial) 정보’를 검색 결과로부터 배제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 판결이 한국의 정보유통자 책임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현재 한국의 법령은 ‘정보가 합법적이라도 권리침해를 판단하기 어렵거나 분쟁이 예상되거나 방통심의위원회의 시정요구가 있으면 그 정보를 삭제·차단해도 면책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합법적이라도 삭제·차단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구글 스페인 결정 또한 ‘합법적이라도 (너무 오래된 정보는 검색 결과에서) 삭제·차단 해야 한다’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검열을 향한 압력이 훨씬 더 강화되는 것이다.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할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정보유통자들의 재판관 역할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미국 저작권법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할 수 없다면 최소한 복원의무를 살려야 한다. 물론 이 경우, 누가 복원요청권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이 부분은 지트레인 교수가 워크숍에서도 지적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법적으로 판례를 통해 결정해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가 지트레인 교수에게 답변했듯이 유럽사법재판소 결정에 등장하는 구글 스페인 사건의 곤잘레스 변호사로부터 사업제안을 받은 사람을 들 수 있다. 그 사람은 곤잘레스 변호사의 과거 재정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 ‘조작’된 검색결과를 복원해줄 것을 요청한다면 구글은 이에 응하도록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럽사법재판소 결정 자체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유럽사법재판소의 결정은 세계 최초로 독립적인 정보유통자의 책임을 창설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는 정보유통자에게 특정 정보가 불법임을 전제로 그 정보를 유통한 책임을 물어왔다면, 이번 결정은 합법 정보도 검색에서 배제할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즉, 정보 자체가 아니라 그 유통행위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합법적인 정보라도 대량처리를 하면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무엇인가? 인터넷은 사실 정보유통자들이 서로 연결된 복합체이다. 인터넷이 각광받는 것은 정보유통자들의 대량정보처리 때문이다. 대량정보처리 행위를 근거로 정보유통자들에게 민사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인터넷을 죽이는 일이다.
물론 모든 정보가 아니라 개인정보의 대량처리에 대해서만 제재하려는 것이라고 하는 옹호 입장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개인정보와 비 개인정보를 다르게 구분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 건물을 건설업자 A에게 맡겨 지으려 한다고 하자. 나는 그 건설업자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내가 일을 맡긴 건설업자가 실력이 떨어지는 형편없는 업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길 건너 아주 멋없는 건물이 있는데 건설업자 A가 지었다더라”는 정보가 개인정보라고 해서 검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멋없는 건물을 지은 건설업자가 내 건물을 짓겠다고 한다”라는 비 개인정보가 검색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인정보의 대량처리만을 골라서 제재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들의 은폐를 의미한다.
많은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는 정보주체의 소유물이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회 ‘속으로’ 태어난다, 아니 던져진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우리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타인들에게 위탁함으로써 생존해 왔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의 사회생활은 개인정보를 쉴 새 없이 외부에게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내 이름이나 내 얼굴은 내 개인정보라기보다는 타인이 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사회에 던져지는 나의 공적 징표다.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은 내가 쓰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이 사용하라고 만들어지고 타인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이 정보들을 내가 소유하려 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종식을 의미한다. 개인정보의 ‘소유권’ 또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으로 미화된 이 개념은 개인정보가 정부기관이나 업체들에게 넘어갈 때, 그 이용의 범위나 목적에 대한 합의가 항상 불완전계약이 되는 행태에 대응하기 위해 창안된 것일 뿐이다. 이를 기계적으로 집행하려고 하다 보면 문명 자체가 무너진다.
물론 정보제공시의 불완전계약 문제는 해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제공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 정보, 즉 일반에게 이미 합법적으로 공개된 정보에 대해서는 불완전계약의 문제가 아예 발생하지 않으며 개인정보소유권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사건에 적용하자면, 곤잘레스 변호사의 공매 사실이 합법적으로 공개되어 있는 이상, 그 정보를 검색 등의 방법으로 유통하는 것을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따라 제재하려는 것은 개인정보소유권 또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원래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도 게재된 바 있음: http://nter.naver.com/naverletter/textyle/10947?category=1232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