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Feels Good Man》이 표현의 규제에 소극적인 까닭

by | Oct 7, 2022 | 오픈블로그, 표현의 자유 | 1 comment

글 | 오경미(오픈넷 연구원)

이 글은 오경미 연구원이 2022년 10월 3일 인천 미림극장에서 열린 ‘커뮤니티 시네마 페스티벌 2022’ 공통섹션 상영작 《밈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GV 발표문을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

영화 《Feels Good Man》은 아서 존스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페페라는 개구리 캐릭터와 캐릭터의 원작자인 맷 퓨리의 사적인 일상을 통해 미국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영화는 개구리 페페라는 캐릭터가 원작의 스토리에서 대중에 의해 탈맥락화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맷 퓨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원작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캐릭터가 공신력 있는 기관에 혐오의 상징으로 등재되는 등의 일을 경험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캐릭터가 변질되는 과정, 원작자가 겪는 일을 따라가면서 영화는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조악한 외관의 밈(meme, 온라인상에서 반복적으로 모방, 재가공되는 콘텐츠)에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 사회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혐오표현, 표현의 자유, 저작권, 저작권 침해의 대응과 한계, 이미지의 참조·모방·패러디 등 이미지가 탄생 후 겪게 되는 운명 등의 세부적인 주제로 구체화됩니다. 페페밈은 원작이 있는 이미지의 모방으로 인터넷을 통해 대량 생산되어 유통되는 특성을 가지는 콘텐츠입니다. 밈이 미국 사회에 내재해 있었던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갈등을 이용해 욕망하는 바를 이루려는 다양한 주체들이 또 다시 밈을 활용하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은 영화를 이끄는 내러티브입니다. 이 글은 이 부분에 주목해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를 큰 틀로 두고 페페 이미지가 왜곡, 개변조되면서 혐오의 상징이 되는 과정, 영화의 감독과 페페의 원작자가 이 갈등에 대응하는 방식과 이유, 혐오표현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탈맥락화된 페페

영화는 페페가 탈맥락화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 과정에서 페페를 탈맥락화하는 다양한 주체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되죠.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ding), 4CHAN 유저들, 여성혐오자, 은둔형 외톨이, 인종차별주의자 등이 결집한 대안 우파, 알렉스와 같은 음모론자, 페페밈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암호화폐거래자, 인종차별주의를 전달하는 책을 제작하려는 교감,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진보정치인, 반명예훼손연명(ADL, Anti-Defamation League) 그리고 홍콩 민주주의 시위 참가자들이 그들입니다. 

사실 페페는 처음 밈으로 만들어질 당시 기이하게 패러디되기는 했으나 혐오스러운 이미지는 아니었습니다. 페페밈은 처음에는 사회와의 소통과 관계맺기를 자발적으로 기피하던 이들이 모여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공유하던 4CHAN 유저들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조적인 일상을 사이트에 공유하며 왈가왈부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콘텐츠의 맥락에 상관없이 맷 퓨리의 페페 이야기에서 반복되었던 문구인 “feels good man”을 덧붙여 싱거운 웃음을 유발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페페밈은 파괴적 욕망을 투영하는 이미지로 둔갑합니다. 영화는 이들의 위험한 욕망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걷잡을 수 없는 단계로 발전해나가는지 따라갑니다. 페페밈을 만들고 인터넷에 뿌리는 것이 일종의 유희로 자리잡아가며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게 되자 너도나도 그 행위에 동참합니다. 니트족으로 정체화하며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여성을 향한 혐오,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던 4CHAN 유저들은 그간 페페밈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투영해왔습니다. 그런데 자신들과 비교해 안정적인 삶을 누린다고 보이는 이들이 페페밈을 전유하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밈 생산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더욱 맹렬하게 폭력의 수위가 높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죠. 영화는 2014년과 2015년 미국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들이 프로필 사진을 페페밈으로 설정해두었던 사실을 중요하게 거론하며, 이 사건을 상상의 영역으로 봉인되어 있었던 파괴의 욕망이 현실로 분출한 계기라고 정리합니다. 이들의 파괴적 욕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영화는 평가하죠. 존 마이클 그리어와 같은 학자는 밈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에너지를 부을 수 있는 중심점이나 씨앗 역할을 했다고도 언급합니다.

비판과 규제 사이의 균형점 찾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게 되면 보통 표현을 규제하자는 논의로 이야기가 전개되게 마련이지만 영화는 비판과 규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작가의 대응은 관객의 입장에서보면 꽤나 답답합니다. 맷 퓨리는 페페밈이 폭력과 연계되는 지경에 이를 때도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는 하였으나 그들이 쏟아내는 불쾌한 표현, 혐오표현, 조롱에 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자신의 캐릭터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라며 거리를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그칩니다. 초반에는 페페의 내러티브가 모두 해체되어버렸다며 매우 흥미로워하기도 했죠. 퓨리는 페페와 비슷하지만 다른 캐릭터를 창조해 동화책을 쓰면서 사건과 자신을 의식적으로 분리시키려 노력합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4CHAN 안에서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지만 NEET족, 백인 우월주의자, 여성혐오론자, 인종차별주의자 등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대안 우파’라고 호명하며 페페밈을 혐오의 상징으로 규정합니다. 그러자 각종 미디어들이 이를 받아쓰기 시작합니다. 반명예훼손연맹은 급기야 페페를 혐오의 상징물로 규정하고 연맹의 혐오상징 목록에 등재해버립니다. 이 사건은 페페 원작자로서 맷 퓨리의 일상에 분기점을 만들죠. 원작의 내러티브에서 완전히 탈맥락화되었으나 페페의 원작자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므로 그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판매를 위해 제작한 굿즈도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경제적인 손실도 입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리는 온건한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합니다. 페페구명 캠페인을 개최해 페페의 내러티브를 재맥락화하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페페밈을 위한 아카이브를 만들기도 하죠. 페페밈을 자신들만의 것인양 전유하려는 이들에 의해 참수당한 이미지로 조롱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까지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죠.

이렇게 참던 그가 덴튼 교육청 소속 교감이 페페를 이용해 이슬람을 혐오하는 인종차별의 의도를 담은 동화책을 만들어 판매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음모론자이자 유튜버인 알렉스 존스가 페페밈을 넣어 도널드 트럼프를 옹호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판매하려고 할 때 비로소 법적 대응에 나섭니다. 흥미로운 점은 맷 퓨리가 법적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 저작자의 권리, 저작권이라는 것이 가진 특수성, 창작이라는 행위의 본질, 그에 따른 아이러니를 영화가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점입니다.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한 뒤 법정에 출두해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그가 창작했다는 캐릭터가 기성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점, 저작권 이용 허락을 받지 않고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것을 작가가 인정하는 장면 등이 여과없이 노출됩니다. 영화가 작가의 심정을 꽤나 자세하게 따라가며 그가 처한 상황에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무조건적인 표현물 규제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이죠. 창작물이라는 것은 참조의 과정을 거쳐 탄생하며, 이렇게 탄생한 창작물은 이후 세대가 탄생시킬 또 다른 창작물을 위한 참조의 대상이 되는 운명을 영화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술사에서 예를 찾아볼까요? 폴 세잔은 이전 세대들에게 공식과도 같았던 원근법을 무시하고 사물을 단순화해 그립니다. 이것이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잔의 그림은 여러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의 시점에서라면 볼 수 없는 사물의 측면까지 그림으로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세잔의 파격적인 시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를 탄생시킵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눈과 코와 입을 가진 아비뇽의 처녀들의 얼굴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피카소는 더욱 대담하게 사물을 해체합니다. 피카소의 해체적인 시각은 보고 그리는 전문가로 조직된 미술계에 “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죠. 사물을 “진실하게” 바라보려 했던 세잔의 그림을 참조하지 않았다면 피카소의 그림을 우리는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저작물의 참조는 법으로도 보호받고 있습니다. 저작권법은 원작을 모방하거나 본뜬 것이 원작의 명성을 압도하거나, 동의를 받지 않고 원작을 모방해 그것으로 금전적 이익을 얻는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표현물을 모방하고 복제해 유통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않습니다. 저작물이 유통되어야 새로운 창작물도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미국과 한국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저작권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저작권은 재산권적 성격을 가지죠. 미국은 저작권의 경제적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해 국제 무역교류의 대상에까지 포함시켜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해오고 있습니다. 저작자의 권리를 이렇게 중시하면서도 미국 저작권법 제107조는 ‘비평, 논평, 시사보도, 학습을 위한 복제, 학문 또는 연구 등의 목적을 위해 저작물을 복제하거나 저작물 보호를 위해 규정한 방법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저작물을 이용하는 경우, 그 사용의 목적과 성격, 보호되는 저작물의 성격, 사용된 부분이 보호되는 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양과 상당성, 저작물을 사용함으로써 보호되는 저작물의 잠재적 시장이나 가치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사용을 허가’하는 “공정이용”의 조항을 두어 저작자의 배타적인 권리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공정이용의 적용 범위를 넓게 설정해두어 저작자의 권리와 저작물의 이용과 유통에서 균형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페페밈 역시 이 조항으로 보호받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저작권법의 입법 목적에서 그 균형점이 잘 드러납니다. 한국의 저작권법 제1조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작자와 이용자 모두의 권리와 이익 사이의 균형점을 맞추어 관련 산업은 물론 저작물에 대한 상호 참조로 인류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어 향상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위한 법이라는 것을 위의 입법 목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 저작물을 포함하는 표현의 규제에 소극적인 대처는 혐오표현 규제에 있어서도 유지됩니다. 생산된 페페밈 중 대부분은 불쾌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중 당연히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영화의 막바지에 맷 퓨리는 반명예훼손연맹을 찾아가 페페를 혐오상징 목록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영화에서 맷 퓨리와 반명예훼손연맹의 담당자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매우 간략하게 압축되어 있지만 자료를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맹의 홈페이지에서 혐오상징으로 등록된 페페와 그에 대한 연맹의 설명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연맹은 “페페밈이 본질적으로 편협하지 않으므로 페페밈을 게시한다는 사실이 게시자가 인종차별주의자라거나 백인우월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페페밈이 인종차별이나 백인우월주의를 고취하려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 중요하며 이 경우에만 증오의 목적을 담은 혐오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설명의 하단에 이러한 문맥에서 사용된 이미지도 열거하고 있습니다. 또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지만 반명예훼손연맹은 맷 퓨리가 2016년 페페구명 캠페인을 벌였을 때 공식적으로 퓨리와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규제되어야 하는 표현의 범주를 아주 협소하게 설정하여 규제되어야 하는 표현은 비판하고 유통되지 못하도록 하되, 자신들의 활동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죠. 

혐오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보호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다

영화는 끝까지 혐오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보호를 대립각으로 설정하지 않습니다. 반명예훼손연맹의 “페페밈은 많은 변형이 이루어졌으나 본질적으로 편협하지 않다”는 설명과 인종차별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의도를 담은 맥락을 고려해 혐오표현에 속하는 페페밈만을 혐오상징으로 간추려낸 결정은 대중이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감정을 초래하는 페페밈도 존재하나 그건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둔다는 함의로 해서할 수 있습니다.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어떤 표현들을 규제한다면 일시적으로는 그러한 감정을 느껴 고통스러웠던 이가 심리적인 보상을 받을 수는 있죠. 그러나 불쾌함, 불편함이라는 기준으로 어떤 표현을 규제하게 되면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큽니다.

혐오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보호를 우리는 대립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혐오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보호는 소수자 차별 금지와 권리보호라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어떤 표현이 올바름을 말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불편한 감정, 불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래의 작품은 아니타 스테켈이라는 작가의 작품인데요, 1980년대 에이즈가 발병했을 당시 레이건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오히려 성소수자 차별과 공황을 부추긴 것을 비판하기 위해 그린 작품입니다. 가부장제로 연대하는 차별주의자라는 뜻을 담고 있죠. 이런 표현은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 해소를 위해 필요한 비판이고, 공무의 책임을 가진 이에게 그 역할과 책무의 중요성을 되새기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비판입니다. 불편한 감정, 불쾌한 감정을 근거로 표현을 규제한다면 이런 표현 역시 규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표현에 불편하게 불쾌함을 느낀 장본인들이 이 표현이 유통되지 못하도록 규제할 가능성이 높은 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 이와 같은 표현들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니타 스테켈, 대통령의 악수, 1983
이미지 출처: clampart.com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입니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사회적 소수자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문화를 향유할 조건은 물론 아주 기본적인 생활을 누릴 자격에서조차 박탈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 소수자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당하고 있는 차별, 불편부당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드러내 문제점을 알리고 개선을 요구해야 합니다.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로 표현을 하거나 언론에 알리거나 책을 써 내거나 집회나 시위를 하기도 하죠. 그래서 표현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포괄합니다. 

혐오표현의 규제는 정교한 개념 정의와 명확한 보호 대상 설정 이후에 

이처럼 중요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각 국가들은 법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하지만 혐오표현의 개념과 혐오표현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두텁게 보장하고 있는 이유로 혐오표현 규제에 매우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위법한 행위를 선동하거나 도발하는 언사, 음란물, 명예훼손적 표현 등은 수정헌법 제1조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 등의 사회적 규제 장치로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행하는 증오범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여 혐오표현을 간접적으로 제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양정화; 2021). 영국 역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법은 없으나 개별법으로 피부색, 인종, 민족성, 국적, 종교, 성적 지향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공공질서법이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있으나 차별적 언행이 대상을 폄하하거나 비하하려고 하였는지에 따라 범죄의 성립 여부가 결정됩니다. 캐나다와 독일은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경험으로 유럽 국가 중 가장 광범위하게 혐오표현을 형사처벌하는 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 역시 매우 구체적으로 혐오표현의 표적 집단, 구체적인 행위, 혐오표현의 전달 방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역시 규제하고는 있으나 그 경우를 매우 명확하고 좁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연방헌법 제318조에 의해 집단학살을 옹호하거나 선동한 자를 처벌하는데, 조항에서 집단학살을 “식별할 수 있는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말살할 의도로 그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고의로 집단의 신체적 파괴를 유발하려고 그 집단의 생활조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피부색 또는 인종, 종교, 출신국 또는 출신민족, 연령, 성별, 성적 지향, 정신적 육체적 장애에 의해 구별될 수 있는 사회집단”으로 그 식별집단을 한정하고 있습니다(송현정; 2020).

반면 한국은 국가보안법 제7조, 형법 제307조 명예훼손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통신심의제도 등의 법률과 제도로 표현에 대해 강한 국가 규제의 기조를 유지해왔습니다. 지난해에는 1995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를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한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위의 국가들과 달리 표현에 대한 규제 조항은 많지만 규제가 필요한 차별 행위는 무엇인지, 차별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인지, 왜, 어떤 사유로 표현하는 행위를 규제해야 하는지와 같은 규범적 차원의 토대는 상대적으로 매우 허약합니다. 이런 탓에 국내 혐오표현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유엔인권기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이주영; 2015). 

모욕, 조롱, 멸시를 담은 혐오적 표현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소수자의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바로 그 표현의 자유 보장을 근거로 모욕과 경멸, 멸시를 전달하는 혐오적인 표현은 누구나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법의 규정이 너무 협소해, 혹은 규제할 수 없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경우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타겟팅해 차별하고 괴롭히는 혐오표현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이 없는 한국과 같은 국가의 경우 차별금지법을 신속히 제정할 것을, 그 외의 경우 피해자에 연대하는 것, 대항표현을 장려하고 지지하는 것, 사회적인 교육 등을 대처법으로 꼽았습니다. 피해자 연대와 대항표현 장려의 예를 살펴보죠. 2021년 2월 24일 정보인권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인 오픈넷이 대항표현에 관한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연사 중 한 명이었던 혐오표현 프로젝트 연구팀장인 캐시 버거는 SNS상에서 일어난 실제 사례를 토대로 대항표현에 대해 진행한 연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연구 결과, 혐오표현을 발화하는 발화자의 인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면 혐오표현을 초래하는 SNS상의 게시물이나 댓들이 사장될 수 있도록 긍정적인 코멘트를 남긴 것은 효과적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활동은 대항표현을 지지하지만 소극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연쇄적인 파급효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또 대항표현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보다 많아야 효과가 컸고,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대항표현을 하거나 참여했을 때 그 효과가 더 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좋은 사례로 2014년 유럽 축구 리그에서 일어난 혐오표현과 그에 대한 대항표현, 연대를 들어주었습니다. 축구 경기 도중 관중이 소수인종의 축구선수들에게 바나나를 던지는 혐오표현이 일어났는데, 두 명의 브라질 출신 축구선수가 의도적으로 관중이 경기장으로 던진 바나나를 주워먹었고, 팀원들이 “우리는 모두 원숭이다”라고 말하며 바나나를 먹는 지지 영상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이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버거는 이 사례로 혐오표현 발화자를 직접 언급하는 것보다 거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시도가 더 효과적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가며

인터넷 기술을 기반으로 사회적 약자를 타겟팅해 혐오하는 표현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매우 빠르게 큰 규모로 퍼져나가는 시대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페페밈을 혐오표현으로 규정한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당선 이후 줄곧 표현의 자유 보장을 대외적으로 거듭 표명했습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극렬하게 날을 세우며 맞섰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표현의 자유의 가치를 보호한다는 목적보다는 서로의 정치적 이익과 세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의 원론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비관보다 낙관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막바지에 홍콩 시민들이 중국 정부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 표현의 자유를 실천하는 민주화운동 시위 과정에서 페페가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아무리 낡아버렸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여도 노력해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으며, 표현의 자유도 그 중 하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말이죠. 

[참고자료]
버거, 캐시, “[발표영상] 성공적인 대항표현을 위한 몇 가지 전략”, [포럼] 혐오에 맞서는 대항표현, (사)오픈넷·진보네트워크센터, 2021.
송현정,“혐오 표현의 판단 기준에 관한 비교법적 연구”, 사법정책연구원,  2020.
양정화, “미국 혐오표현 및 증오범죄 규제 범위와 쟁점”, KIPA 규제동향 여름호, 한국행정연구원, 2021.
이주영, “혐오표현에 대한 국제인권법적 고찰: 증오선동을 중심으로”, 국제법학회논총 제60권 제3호(통권 제138호), 대한국제법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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