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통신의 자유와 통신자료제공제도

by | Aug 16, 2022 | 오픈블로그,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 0 comments

글 | 박경신(오픈넷 이사, 고려대 교수)

“인터넷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익명표현은 인터넷이 가지는 정보전달의 신속성 및 상호성과 결합하여 현실 공간에서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의한 위계구조를 극복하여 계층·지위·나이·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국민 의사를 평등하게 반영하여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되게 한다. 따라서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2010년 제기한 인터넷실명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문 내용이다. 곱씹어 보면 세계헌법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다. 과거 ‘편집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민주화운동서적들이 유통되었는가. 익명표현은 이렇게 민주주의에 중요하다.

하지만 익명통신의 자유는 자신의 실명을 어딘가 보관하도록 강제했을 때만 침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관된 내 실명을 타인이 내 의사에 반하여 꺼내볼 때도 침해된다. 그래서 참여연대는 2010년 인터넷실명제와 통신자료제공제도에 동시에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12년간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지난 7월21일 통신자료제공제도 결정문에서 자신이 10년 전 그리도 상찬한 익명표현의 자유를 간과하였다.

헌재는 신원정보의 제공이 판사의 영장 없이 이루어져 문제라는 주장은 전기통신사업법 83조3항이 수사기관에의 정보제공을 허용할 뿐 강제하지 않아서 영장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며 배척하였다. 영장주의는 압수수색과 같은 기본권침해가 이루어질 때, 판사의 검증을 사전에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실제로 인터넷업체들은 영장 없는 통신자료제공을 거부해왔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일리가 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슈를 회피하였다.

사실 2010년 헌소 제기 후 실명제는 위헌을 받았지만 통신자료제공제도는 진즉에 각하당했었다. 이번처럼 공권력의 행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헌재의 말이 맞다면 통신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고객의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니 이에 대해 책임을 묻자’는 취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네이버소송). 2013년경 2심에서 승소를 하면서 바로 이때부터 온라인회사들은 영장 없는 통신자료 제공을 거부했지만 2016년 대법원은 종국적으로 사업자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어? 헌재는 국가도 책임이 없다고 했는데? 2016년 대법원과 2012년 헌재의 각하결정을 종합해 보면 83조3항은 통신자 신원정보를 프라이버시의 보호영역에서 제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강제로 취득하진 않으니 영장주의는 적용되지 않더라도 정보보유자가 자유롭게 공개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법률에 의해 헌법상 기본권을 축소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법으로 이름과 전화번호 조합이 실린 전화번호부를 발행하도록 허용하면 프라이버시 침해가 발생한다. 헌재는 바로 이런 실체적 프라이버시 축소 문제를 회피했다. 다행히 헌재는 적법절차 원칙에 따르면 국가에 의한 기본권제한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통지가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불합치를 결정했다. 아무리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징수할 수 있는 물건이 있어도 몰래 훔쳐올 수는 없다.

사실 2012년 네이버소송 2심 이후 통신자료제공은 중단될 줄 알았다. 당시 2심 1건에 50만원의 위자료가 판결되었는데 연간 600만명에 대해 제공되었으니 총 손해배상 액수는 천문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K텔레콤 등 통신사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이에 통신사의 제공사례를 찾아 손배소를 하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개인정보보호규정상의 열람권을 행사하는 소송을 통신사 3사를 상대로 제기하였고 1심 승소하였다. 1심 승소를 발판으로 사단법인 오픈넷과 참여연대가 집단으로 통신자료제공 확인신청을 하는 이용자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최종적으로 승소하면서 지금처럼 각 통신사들 홈페이지에 ‘통신자료제공 확인신청’ 메뉴가 만들어져 국민 누구나 알고 싶은 사람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번 결정은 국민이 먼저 안 물어봐도 알려주게 되니 더욱 좋다. 사후통보가 대량으로 이루어지면 수사관들을 포함한 국민 전체가 프라이버시 침해의 깊이를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결국 제공 숫자라도 미국·유럽 등 비슷한 무영장통신자 신원확인제도를 둔 다른 나라 수준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하지만 우리의 프라이버시 감수성과 달리 법률은 전화번호부 시대에 사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오픈넷이 제기했던 휴대폰실명제 헌소도 기각되었다. 익명의 자유가 민주주의에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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