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터진 대규모의 디지털 성폭력 사건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유난히 관대했던 우리 사회가 치르는 아주 가슴 아픈 대가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 대가는 우리 사회가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 수법이 잔인해지는 성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왔던 여성들이 치르고 있다. 수법이 점점 잔인해지고 대범해지는 디지털 성폭력을 포함한 성폭력에 제동을 걸고 근절하기 위해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이나 규제가 성범죄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는 결코 될 수 없다.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도 우려된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지난 4월 6일 강력한 처벌을 위해서 성범죄와 음란물을 명백히 구분하는 법제 변경을 요구하는 한편 부작용을 막기 위해 플랫폼에 책임을 과도하게 지우는 규제에 반대하는 논평을 낸 바 있다. 이어 오픈넷은 디지털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 성범죄 촬영촬영물 소지죄에 대한 신중한 논의를 시작할 것과, (2) 이른 시기부터 포괄적인 성교육을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성인 대상 성범죄 촬영물 소지죄에 대한 신중한 논의 필요
지난 국회에서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발의되었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개정안 중 일부는 성인(주로 여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대상 불법 촬영물과 복제물 소지죄를 신설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일 것을 여성계에서 꾸준히 요구하였으나 우리 사회는 무심하게 대처해왔다. 성폭력 전반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은 남성들이 강간문화로 연대한다는 표현까지 만들어냈으며, 가해자들이 더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끔 유도한 토대가 되었다.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성범죄를 어떻게든 빨리 위축시킬 필요가 있다. 성범죄 촬영물 소지죄의 도입은 현 상황을 진정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다.
현행법상 성범죄 촬영물의 소지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의 소지만 처벌하는데, 그 이유는 아동의 성행위 촬영은 그 아동에게 항구적인 정신적 피해를 남기며 그 촬영물에 대한 소지 욕구가 촬영행위를 촉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성범죄도 다르지 않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과 청소년과 아동의 섹슈얼리티는 남성들의 그것과 달리 취약해 보호가 필요한 대상으로 간주한다. 강간 장면의 촬영 또는 n번방과 같은 강요와 협박에 의한 성행위 장면 촬영 역시 피사체인 여성에게 비슷한 피해를 발생시키고 소지와 촬영 사이에 비슷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성범죄 촬영물 소지죄 도입을 우리 사회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섣부르게 소지죄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도입 방식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우선 성폭력처벌법상 불법 촬영물 소지죄가 도입된다면 한국은 성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성범죄 장면을 촬영한 영상물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처벌받는 첫 국가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심지어 실제 살인행위나 강간행위를 촬영한 영상물인 소위 스너프 필름에 대해서도, 살인행위나 강간행위 등 실제로 이루어진 범죄행위는 처벌되지만 영상을 소지했다고 처벌받는 소지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남용되어 왔던 과거 역시 소지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우리나라 현행법상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결과물을 의미하는 불법 촬영물의 개념이 촬영과 배포의 전후 정황을 모르고 범하게 되는 소지행위에 적용될 경우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연출된 영상과 진짜 범죄영상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에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성행위와 촬영이 모두 합의 하에 이루어진 후 유출만 의사에 반하게 된 경우에도 소지죄가 적용되어야 하는지도 세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따라서 소지의 처벌은 촬영된 행위가 범죄행위인 경우로 한정되어야 함은 물론 그 사정을 소지자가 알고 있는 경우로 한정되어야 한다. 또 고발 및 수사목적의 소지는 일반인에 대해서도 허용되어야 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촬영물 소지죄의 형량은 아동 성착취물 소지죄보다 높아서도 안 된다.
성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성교육의 지향점과 교육안 재설계해야
성폭력과 같은 범죄를 강력한 처벌과 규제 만능주의로 억누르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띄는 결과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과 규제가 성폭력 범죄를 없애지는 못한다. 모욕죄로 성희롱을 고소하고 처벌할 수 있으나 모욕죄의 존치로 성희롱을 뿌리뽑지는 못하듯이 말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섹슈얼리티의 취약성이 오히려 비례해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처벌과 규제는 사회적 약자들의 섹슈얼리티가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뿐 왜 취약할 수밖에 없는지, 섹슈얼리티의 취약성과 이를 이용한 낙인찍기와 혐오 조장이 왜 남성들의 경우에는 해당되기 어려운지, 이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이 무엇인지, 이러한 영상물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행위가 왜 범죄인지, 피해자의 위치에 결박당한 사회적 약자가 위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등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성범죄 촬영물”과 “야동”을 혼동하는 일부 남성들의 그릇된 인식과 피해자들이 성적 낙인이 두려워 피해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번 사건의 피해규모를 키운 요인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처벌보다 시급하다. 형식상으로만 존재하고 거의 실시되지 않고 있는 초중고등학교 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실시하고 성교육의 지향점과 교육안을 재설계해야 한다.
유네스코는 2017년 성교육을 생물학적 특징이나 생식기와 연관된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의 생애에서 성과 관련된 모든 경험을 포괄하는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포괄적 성교육이라 규정하고 <성교육 국제 실무 안내서> 개정판을 출간했다.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후천면역결핍증과 성병, 예상치 못한 임신, 젠더 기반 폭력, 젠더 불평등이 만연한 곳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성관계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포괄적인 성교육의 핵심 역할로 설정하였고, 청소년이 향후 타인과 원만하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한 지식, 기술, 태도, 가치를 갖추도록 하는 데 포괄적 성교육의 목표를 두었다. 또한 다섯 살 때부터 성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는 성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나지만 정작 성을 매개로 한 건강하고 안전하고 즐거운 관계 맺기의 방법과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 그 정보에 접근하고 취득할 수 있는 경로에 관한 논의는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 성에 관한 논의의 초점이 성관계와 사회 구성원 재생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은 성교를 포함한 성행위, 성별, 성역할 등 성에 관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생물학적 조건에서부터 경제적, 사회적 조건 등에까지 영향을 광범위하게 미치는 요인이다. 성에 관한 협소한 초점은 사회적 구성원들이 성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다. 이와 같은 지점을 고려해 재설계한 내용으로 이른 나이부터 의무적으로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강간 장면이나 성을 매개로 사회적 약자를 겁박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야동”이 아니라 그 배포나 소지가 범죄일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신체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범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아동청소년들이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변화는 현장의 교사들이 성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전환을 전제로 한 성교육의 필요성과 적극적인 교육 실행에 공감하고 실천해야 가능하다. 여성주의에 공감하는 개개인들의 실천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변화
법적 처벌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변화이다. 강한 처벌은 인식변화를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간 동안은 강한 처벌로 다스리되 처벌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범죄 촬영물이 범죄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성교육을 생물학적 특징이나 생식기와 연관된 것이 아닌 성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모든 경험을 포괄하는 교육으로 재정의하고 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회구성원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20년 4월 16일
사단법인 오픈넷
문의: 오픈넷 사무국 02-581-1643, master@openne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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