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넷 포럼 요약문] 마라케시의 기적: 독서장애인을 위한 정의 구현과 세계지식재산기구의 변화

by | May 31, 2016 | 오픈블로그, 오픈세미나, 지적재산권 | 0 comments

[오픈넷 포럼 요약문]

마라케시의 기적: 독서장애인을 위한 정의 구현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변화 (2016. 05. 19. 개최)

 

* 참조(자료집): https://opennet.or.kr/11756

1. 마라케시 조약의 의의

마라케시 조약은 저작권의 제한과 예외를 의무사항으로 규정한 최초의 국제규범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참가자는 모두 동의했다. Danielle Conway(미국 메인 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교수는 ‘마라케시의 기적’이라는 이번 포럼의 제목이 조약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마라케시 조약은 이용자의 권리와 이익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기에 기적이라는 것이다.

마라케시 조약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정보접근의 권리를 주는 것인데, 왜 저작권자들과 출판업자들은 이러한 지식,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는 걸까? 이는 조약의 수혜자인 시각장애인들이 지적재산권 보호에 위협의 상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출판사, 지적재산권 소유자들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허용한 예외가 다른 수혜자 그룹에게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이들의 반대가 매우 격렬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오히려 시각장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사용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마라케시 조약에는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다양한 당사자들이 참여하여 국제적 연맹을 형성했다. 아프리카 그룹은 정보 부족의 이슈가 이들 국가와 직접적으로 해당됐기에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 과정에 참석해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교육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빈곤층, 책이나 디지털 정보에 접근이 제한된 사람들 등을 생각하고 이 과정에 참여한 것이다. 세계 각지의 도서관과 아카이브들은 시각장애인 등 수혜자 그룹에게 더 많은 저서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위해 싸웠다. 결국 저작권자들에 대항하여 모든 사용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그 결실을 맺었다.

마라케시 조약은 저작권 보호를 받는 저작물을 모든 사용자가 접근할 수 있는 형태(accessible format)로 변환하고, 재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다룬다. Conway 교수는 마라케시 조약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들의 수출을 허용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전통적인 텍스트를 접근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접근 가능한 형태의 저작물을 수출하는 문제에 중점을 둘 필요성을 말했다. 이 경우, 220만 개의 저작물이 변형된 형태로 국경을 넘어 로열티 없이 수출되고, 베른 협약의 관할권 내에서도 저자나 출판사가 저작권을 통제할 수 없어 베른 협약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곳으로 저작물이 수출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게된다.

법적으로 사용자의 권리가 저작권자의 권리보다 더 우선하여 보호된다면, 이용자는 국가를 상대로 자신은 조약에 기초해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저작물을 사용할 수 있는 수혜자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저작권을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완전한 전환으로, 저작권자는 더 이상 기술적 보호 장치로 이용자가 저작물을 디지털 형태로 사용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마라케시 조약은 저작권 보호 일변도의 흐름 속에서 명시적으로 이용자를 인정했기 때문에 혁명적이고, 미국 저작권법의 ‘fair use(공정 이용)’보다 더 나아가는 수준이라고 Conway 교수는 말했다.

남형두(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제인권사의 연장선상에서 마라케시 조약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며, 이를 계기로 정보화 시대에 걸 맞는 장애인 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디지털화가 되고,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격차는 줄어들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구텐베르크 이후 출판물을 중심으로 매체가 발전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도서기근(Book Famine)이 시작되었는데, 19세기 중엽에 촉각을 이용한 점자, 20세기 중엽에 청각을 이용한 녹음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활자 정보에 대한 소외가 조금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방법 모두 나름의 한계를 지녀, 시각장애인들에게 주는 도움도 제한적이었다. 점자의 경우 변환 과정에서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문제와 후천적으로 실명한 사람의 경우 생활 점자 외에 촉각으로 점자를 배워서 읽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문제가 있고, 녹음도서의 경우 누군가가 카세트 테이프에 활자를 읽어 더빙을 해야한다는 점과 테이프를 찾는 것부터 중간에 재생을 멈춘 경우 표시할 수 없는 문제 등이 있기 때문이다.

IT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디지털화 흐름 속에 2000년 초반에 이르러서야 시각 장애인들은 드디어 디지털 파일만 있게 되면 우리가 읽는 것과 똑같이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저작권의 장벽 앞에 시각장애인은 점자와 녹음에만 만족하라는 상황이었고,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습득은 비시각장애인들에 비해 제한되어 정보격차가 오히려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라케시 조약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남형두 교수는 인권의 저작권에 대한 우위확인을 말했다. 저작권법은 헌법에 위임받아 만들어진 법률인데, 장애인들의 인권, 인간의 존엄, 교육받을 권리 등은 시각장애인들의 기본적인 인권이고 헌법에서 보장된 것이다. 헌법의 기본권과 저작권이 충돌하는 경우 기본적 인권이 우위에 서야한다고 보는 입장에서 본다면, 마라케시 조약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저작권계에서 마라케시 조약이 지적재산권의 기초를 허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수 부풀려진 것이거나 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앞으로의 인식에 따라 바꿔질 수 있다고 말했다.

 

2. 마라케시 조약의 체결경위

마라케시 조약은 2013년 6월 27일 체결되었다.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과 저작권이 충돌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WIPO(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세계지적재산권기구)와 UNESCO가 워킹그룹(working group)을 만든 30년 전이다. 2004년 11월에는 WIPO 저작권 및 저작인접권 상설위원회(Standing Committee on Copyright and Related Rights, SCCR)에서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 향상을 위한 저작권 면제 조약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마라케시 조약의 안은 SCCR 18차에서 브라질, 에콰도르, 파라과이 3개국이 WBU(The World Blind Union,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의 안을 받아서 제출해 마련됐다.

18차, 19차 SCCR에 당시 판사로서 한국 대표로 참석해 마라케시 조약의 상정 및 논의 과정을 지켜봤던 입장에서 윤종수(CCKOREA 프로젝트 리드,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교육, 도서관, 아카이빙 등 이전에도 저작권의 제한과 예외에 대한 많은 주장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지만, 시각장애인과 관련된 마라케시 조약안에 대해서는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그는 마라케시 조약의 체결이 가능했던 이유로 우선, 수혜자 그룹이 시각장애인으로 명확했고,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 보장이라는 정당성이 함부로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주제였다고 말한다. 또, WBU 등 비중이 큰 이익단체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단체 연합의 영향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대표단에는 전문성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비중 있는 사람이 많았고, 자연히 단체의 발언권에도 상당한 힘이 실렸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2006년 기준 WIPO 가입국 184개국 중에 57개국이 이미 시각장애인을 위한 법안을 가지고 있었다. 관련 규정을 지닌 미국, 일본, EU 등의 선진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회원 국가들이 시각장애인 등의 저작물 접근확대를 위한 국제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표했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 조약과 같이 구속력을 갖는 방안(binding instrument)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회원국들의 입법에 대한 권고나 다른 사실적인 수단의 확충 등 구속력을 갖지 않는 방안(non-binding instrument)에 중점을 두느냐가 쟁점이었다. 결국, 마라케시 조약의 경우 다른 저작권 제한에 대한 논의와 출발선상에서부터 달랐던 것이다.

 

3. 국내 상황 및 한국과의 관계

한국 정부는 2014년 6월 22일, 마라케시 조약에 서명을 했다. 서명을 한 이후 비준을 1년 이상 미루다가 2015년 10월 초순경, 국회의 비준 없이 행정 협정과 같은 형태로 문화콘텐츠실장이 제네바 WIPO에 가서 비준서에 기탁하였다. 이로써 마라케시 조약이 국내에서 효력을 갖게 되었다. 다만, 국내에서는 시각장애인과 관련한 저작권법의 관련 규정이 이미 있었다.

남형두 교수는 이와 관련한 법개정의 역사를 개괄 설명했다. 1987년도 베른 협약 가입을 앞두고, 우리 저작권법이 전면개정이 되면서 시각장애인 조항 33조가 생겼다. 원래 묵자로 된 출판물을 점자로 제작하는 것도 일종의 복제 침해가 됐는데, 33조에서 저작재산권에 대한 예외조항으로 점자 복제를 허용해주고, 그 후 90년대 들어 녹음에 대해서도 허용을 해주게 된 것이다. 2009년 3월에는, 시각장애인 등 전용기록 방식으로 이른바 디지털 파일을 주는 것에 대해 예외로 허용하도록 33조가 개정되었다. 이는 굉장히 놀라운 것으로, 사실 마라케시 조약의 내용이 2009년에 이미 우리 법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도서관법도 같이 개정되어 출판사들은 합리적인 별도의 이유가 없을 경우 국립중앙도서관 산하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출판물의 디지털 파일을 납본하게 됐다. 이로 인해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듣는 수업의 교과서를 파일로 받고 싶다고 요청하면, 이용할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출판사에서 협조를 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제출하는 파일의 형태도 텍스트 파일로 주면 바로 변환이 가능한데, 대부분 쿽이나 인디자인 같은 출판사 특유의 그림 파일로 제출했다. Pdf 파일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듯, 출판사에서 보낸 파일을 디지털로 바꾸고 다시 대조하는 과정에서 평균 100일의 시간이 지체된다. 또한, 도서관법에서 디지털 파일의 제출과 관련하여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으로 규정하여 의무가 아닌 권고 조항이기 때문에 현재 많은 출판사가 이를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제도는 좋게 들여왔지만 현실에의 적용은 여전히 답보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관련 규정이 이미 있는 상황 속에서 윤종수 변호사는 마라케시 조약의 체결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봤다. 실제로 우리나라 당국은 조약 비준 후에도 법을 바꿀 게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 한다. 오히려 이 조약으로 가장 혜택 받는 곳은 선진국으로부터 변환 가능한 포맷을 받을 수 있는 개발도상국들로 봤다. 특히, 자체적으로 포맷을 만들지 못하고 선진국에서 포맷을 받을 수 있는 아프리카 등 개도국의 혜택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나라 언어 포맷을 받을 만한 수요가 거의 없고, 이를 그대로 받아 번역하는 것은 조약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혜택 받는 것이 사실상 많지 않다고 봤다.

 

4. 마라케시 조약의 한계

마라케시 조약은 기적이라 부를 수 있지만,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조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Conway 교수에 따르면, 마라케시 조약의 진일보한 내용 때문에 이용자 권리에 관한 부분을 반대 측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조약 내용의 이행은 각 국가의 재량에 맡긴다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조약 내용을 전혀 변경 없이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국가가 있을 수 있지만, 수혜자를 명시적으로 나열한 후 비준하겠다거나, 국내법에 이미 마라케시 조약의 내용이 입법화됐다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추가적인 협상은 마라케시 조약의 구성원들에게 베른 갭의 3단계 테스트 조건을 적용하도록 요구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윤종수 변호사는 3단계 테스트의 문제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 테스트에 따르면, 지적재산권의 제한과 예외는 ①어떤 특별한 경우(certain special case), ②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과 충돌하지 아니할 것(not conflict with normal exploitation of the work), ③ 저작자의 합법적인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아니할 것(not unreasonably prejudice legitimate interest of the author) 이 3단계를 차례대로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규정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다. ‘통상적인 이용’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 ‘합법적 이익’의 경우 이익형량 해야 한다는 것 등의 문제가 있다.

베른 협약의 개정으로 복제권의 제한 및 예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해져 도입된 3단계 테스트는 TRIPs가 13조에서 이를 그대로 차용하고, WPPT, WCT도 이를 도입하면서 일반적 국제규범으로 저작권 판단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확실한 저작권 예외 규정 있을 때도 3단계 테스트로 판단해서 여기에 어긋나면 저작권 예외사유를 위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각장애인 조약의 취지는 본디 이익형량이 아닌 특정 계층 보호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공정 이용은 이용자의 권리와 공공 이익을 비교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익형량의 문제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이익형량에서 뒤지더라도 보호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예외사유를 두어야 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한계와 예외규정에 이익형량을 따지는 3단계 테스트가 조약에 들어가 오히려 기존규정의 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익형량으로 따질 게 아닌 예외사유를 이익형량으로 심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남희섭 오픈넷 이사장은 조약 자체의 효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회가 마라케시 조약에 비준을 한 것이 아니라 기탁서를 내는 방식을 취했다. 저작권에 관한 베른 협약, 특허에 관한 파리 협약과 같은 기본 조약이 국회의 동의를 받은 바가 없다. 비준 동의를 받지 않으면 국내법상 효력을 갖는 조약이냐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하다. 또한, 당국은 국내 저작권법에 조약 내용을 반영하여 고쳤기 때문에 입법사항도 아니라는 입장인데, 현실은 다르다. 마라케시 조약에 있는 내용이 국내에 모두 반영이 되어 있지 않거나 조약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게 되면, 법률의 지위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하위인 시행령에 들어가거나, 기술적 보호조치의 경우 장관 고시에 들어가 있고, 그 내용도 조약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라케시 조약 수혜자가 조약에 기해서 권리 주장을 한다든지, 국회가 입법 의무 이행을 하지 않았다고 손해배상을 한다든지 등의 법률적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완전히 달라진다. 미국의 경우에도 조약 그 자체를 비준한 게 아니라 이행법을 만들어 이를 의회에서 통과시켜달라는 상황이어서 마라케시 조약은 미국 땅에 들어가도 아무 효력이 없는 상황이다. 결국, 개별 국가들이 조약을 반영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WIPO가 관장하는 조약은 WTO와 달리 지키지 않을 경우 특별한 제재가 없어 국제법상으로는 강제력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다. 지적재산권에 관한 조약 대부분이 FTA에 가면, 체결국끼리 준수해야 할, 혹은 비준해야 되는 국제적 기준의 의무사항으로 열거된다. 그런데, 2013년 마라케시 조약 체결 이후 가장 비중 있는 FTA인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를 살펴보면, TPP 가입국이 반드시 비준해야하는 조약의 목록(18.7조)에 마라케시 조약은 빠져있다. 한국이 현재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RCEP에서도 마라케시 조약은 나중에서야 ibis 항목에 겨우 들어왔다. 문구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은 조약 비준을 의무화하는 게 아니라 ‘비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로 되어 있다. 결국, 지적재산권 규범이 현실적으로 구축되는 메커니즘 하에서 마라케시 조약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5. 향후 전망과 앞으로의 과제

마라케시 조약의 향후 전망과 관련하여 남형두 교수는 미국에서 조약 비준 여부가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마라케시 조약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제적 유통이기 때문에, 영어권의 상당히 방대한 자료가 나오는 미국이 비준을 해야 조약이 실질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Conway 교수는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장애를 가진 많은 변호사들이 본인이 정보에 접근하는 데 어려웠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 여러 당사자들 및 이익단체와 인권 단체들이 참여하면서 기존에 장애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인식이 없던 당사자들도 접근 가능한 형식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빠른 속도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뀐 분위기 속에서 미국 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상당히 많이 바꿨고, 앞으로도 그 흐름을 이어나갈 것이라 말했다. Conway 교수는 공정 이용의 원칙과 3단계 테스트를 미국에서 어떻게 잘 조화시켰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미국의 공정 이용 원칙에도 한계는 있지만, 3단계 테스트보다는 명확하다. 그리고 이 원칙은 한 명의 재판관이 저작권에 대한 예외를 결정할 때 보다 나은 법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됐다. 마찬가지로, 미국 사법부의 독립성과 개인의 의식에 비추어 볼 때 사법부가 마라케시 조약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을 거란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윤종수 변호사는 마라케시 조약이 국제 저작권 체계에서 지니는 중요한 의미와 별개로 추가적인 논의의 진전 여부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저작권을 가진 자들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선진국 측에서는 이 조약의 체결로 인해 다음 예외조항까지 넘어가는 것을 처음부터 매우 경계했고, 조약의 체결 자체도 오랜 논의 과정 끝에 미국의 입장 변화로 급격히 가능해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조약으로 이용자의 권리나 저작권 예외·제한에 대한 국제저작권체계 및 선진국의 입장이 전체적으로 달라질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와 관련하여 윤종수 변호사는 수혜자 확대의 필요성을 말했다. 시각, 청각 장애인을 위한 지적재산권 제한 규정은 한국 법에 이미 들어와 있지만, 다른 장애인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폐 등 발달장애인의 경우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발달장애의 경우 정보전달 위한 교재부터 대체적 언어수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의사전달이 글로 안 되고, 이미지로만 가능한 경우 관련 교재를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쓰는 것이 저작권에 걸려 있는 상황이다. 다양한 정보를 이해가능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체의사소통수단이 마련될 필요가 있는데, 현행 저작권법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법적 제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선해야한다는 것이다.

남희섭 이사장은 대표단 구성의 변화 필요성과 국제적 담론과 연구를 지역 단위로 전파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선,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표하여 조약을 체결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SCCR 18차 회의에서는 문화부 저작권 담당 전문관, 문화부 국제협상 담당자, 저작권위원회의 법제담당자, 제네바 주재원(특허청 파견 1등 서기관) 등이었다. 이런 대표자들은 주로 외교부 훈령에 따라 움직이는데, 18차 당시에도 미국, EU, 일본 등과 마찬가지로 마라케시 조약 관련하여 강제력이 있지 않은 soft recommendation으로 가자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표명 이전에 국내 이해당사자인 시각장애인 시설이나 도서관 등과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 이에 당시 장애인 단체에 있던 남희섭 이사장이 문화부에 항의 방문을 했고, 19차 회의 때는 보건복지부 담당자가 들어가게 됐다. 당시 회의 참석한 사람들에 따르면, 한국이 이전과 달리 상당히 긍정적 기여를 했다고 한다. 한국 이외에도 저작권 담당자들만이 아니라 보건복지부 등에서 참여를 했더라면, 마라케시 조약이 보다 빨리 체결되고, 내용도 훨씬 달라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대표단의 구성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적재산권이 세계화된만큼 이에 대한 저항의 흐름도 꾸준히 있어왔다. 대항담론으로서 인권에 관한 학문적·개념적 연구가 진척되고 있고, 유엔인권기구 등에서 구체적 정책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역 및 개별 국가 단위까지는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이다. 각국의 정책을 실제로 담당하는 이들, 예를 들어 특허청의 공무원이나 문화부의 저작권 담당자나 국회의 교문위 의원 혹은 보좌관, 전문위원 등 실무가들에게 인권과 지적재산권은 먼 얘기이다. 따라서 마라케시 조약을 추진했던 사람들이나 지적재산권의 인권 측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접촉면을 넓히면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이해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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