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터넷 조율의 역사

by | Feb 24, 2013 | 망중립성, 오픈블로그 | 0 comments


이 원고는 open-network.org에 기고할 목적으로 “한국 초기 인터넷의 역사, 12장 인터넷 조율 (Draft)”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전길남
(KAIST, 게이오 대학)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넷 기술은 필연적으로 상호 통신에 필요한 원칙이나 규약을 만드는 인터넷 조율기구와 함께 발달해왔다. 전세계적으로 초기 인터넷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연구망이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자 네트워크 관리자들이 인터넷 운영에 필요한 조율을 담당했다.
국내 인터넷 조율의 역사는 국내에 처음으로 IP주소와 .kr 국가최상위도메인(ccTLD)이 할당된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이 운영하던 인터넷인 NSF넷(NSFNet)이 IP 주소(IPv4)를 전세계에 개방하기로 하면서, 그 이전에 각각의 인터넷을 구축하고 있던 국가들이 서로 연결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국내 최초의 IP 주소블록인 128.134.0.0(B 클래스)이 할당되었다. 당시 KAIST 전길남 박사 연구실이 이끌던 ‘SDN 운영센터’는 이듬해인 1987년에 .kr 산하의 2, 3단계 도메인 네임에 관한 규격을 설계하고, .kr 도메인 네임 서버 sorak.kaist.ac.kr을 설치함으로써 전세계 어디서나 인터넷을 통해 .kr을 주소를 가진 국내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두글자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ac(교육기관), co(일반), go(정부), re(연구소)가 바로 이때 만들어진 2단계 도메인네임 원칙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두 글자 도메인 네임 원칙은 일본을 비롯해 외국 인터넷에도 적용되었다.
초기에는 인터넷에 연결된 국내 호스트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IP 주소와 도메인 네임의 할당 및 관리운영은 기타 네트워크 운영에 관한 운영과 마찬가지로 KAIST SDN 운영센터에서 담당했다. 주 업무는 B 클래스 주소블럭 신청을 받아 미국 DDN사의 NIC에 신청하는 업무를 대행해주거나 할당받은 C 클라스 주소를 직접 할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1년 ‘학술전산망협의회’가 발족되면서 그 산하 전문가들의 위원회인 ‘SG-INET’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학술전산망협의회'(Academic Network Council, ANC)는 SDN 뿐 아니라 1988년에 만들어진 교육전산망(KREN), 연구전산망(KREONet)의 네트워크 책임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기구로 국내 인터넷 운영과 개발에 관한 최종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했다. ‘학술전산망협의회’는 1994년, 개시를 막 앞두고 있던 상용인터넷서비스와 향후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통해 팽창될 국내 인터넷 이슈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논의될 수 있도록 학술연구망 뿐 아니라 상용망(KT, 데이콤, 아이네트, 한국PC통신 등), 국가기간전산망 및 인터넷 관련 기업들을 포함한 ‘한국전산망협의회(Korea Network Council, KNC)’로 확대 개편된다.
한편, 1990년대 초반부터 국내외적으로 인터넷의 핵심 자원(resource)인 IP 주소와 도메인 네임의 할당과 운영을 전담하는 NIC(Network Information Center, 망정보센터)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0년을 전후로 미국에서는 상용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국내 인터넷 역시 미국과의 전용선으로 연결된 인터넷인 HANA/SDN 망이 개통되면서 점차 인터넷 사용자 수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국내 NIC의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2년 JWCC[1]에서였다. JWCC에 참여했던 한국과 일본이 각각의 NIC을 설치하기로 하면서 ANC에서 국내 NIC의 설립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작성된 IP 주소의 관리에 대한 지침을 담은 IETF RFC1466에서도 NIC의 체계화를 통해 등록 기능의 지역 단위 분담(distributed regional registry)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를 RIR(Regional Internet Registry, 지역 단위 인터넷 등록기구)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InterNIC이 점차 각 지역 단위 (유럽, 아시아태평양, 남미, 아프리카 등)의 NIC에 등록 기능을 위임(delegation)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권장했는데[2],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우도 이에 발맞추어 APCCIRN(Asia-Pacific Coordinating Committee for Intercontinental Research Networking) 활동의 일환으로 1994년 경 APNIC(Asia-Pacific NIC)을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KAIST 박사과정이었던 박태하가 북미, 유럽(RIPE NCC), 일본(JNIC) 등지의 NIC의 활동과 설립동향을 파악하고, 국내 NIC 운영 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 NIC의 설립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한국 망 정보 센터 구축 안을 작성하였다.[3] 공식업무는 1993년 4월에 시작되었고, 명칭도 KRNIC으로 변경되었다. 조직구도 상으로는 ANC 의장 직속 기구로 편재되어 KAIST에서 운영되는 형식이었다. NIC의 역할은 등록(registration service), 데이터베이스(database service), 통계(information service) 3가지로, 실제로는 미국의 존 포스텔이 IANA를 운영했던 것처럼 1~2명이 운영을 맡아서 했다. 이처럼, 당초 KRNIC은 국제 인터넷 커뮤니티의 자율적인 조율의 전통 안에서 국내 인터넷 조율의 필요성에 따라 인터넷 개발자들과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자율적으로 만든 기구였다. 인터넷은 연구자이자 개발자들이 정보공유의 필요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구축한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NIC을 비롯한 인터넷 조율기구를 이용자들이 직접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한국 R&D 망 구성도, KRNIC-05, 1993.4.13.]
그러던 어느 날, KRNIC 실무자였던 박태하는 정보통신부(당시 명칭은 체신부)로부터 KRNIC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문의를 받게 된다. 정보통신부의 의문은 “인터넷이라는 게 있고,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이걸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냐,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KAIST가 그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박태하가 “우리보다 인터넷 분야에서 앞서있는 미국에서도 연구자,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고, 그 안에서 대표를 선출한다”고 대답하면서 대화가 오갔다. 그 후 얼마 후, 정보통신부로부터 KRNIC에 한 장의 공문을 보내왔다. 공문의 요지는 KRNIC의 업무를 KAIST에서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KRNIC이 설립돼 운영되는 중이었는데, 그런 공문이 온 것이다.[4]
이 공문은 한국 정부가 인터넷 조율에 관여하게 되는 첫번째 의지를 담은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3년 현재까지 인터넷에 연결된 대부분의 국가에서 NIC 기능을 비롯한 인터넷 관련 조율은 인터넷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구성된 기구나 단체에서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독특하게 2004년 제정된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에 의해 NIC 기능을 포함해 인터넷 조율의 권한을 정부가 가지게 되었다. 2012년 말, 각국 정부들이 멤버로 참여하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의 규약 논의에서 전통적으로 “통신”에 속하지 않던 인터넷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전 세계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인터넷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있었던 셈이다.
국내 인터넷 도메인은 상용인터넷 서비스가 개시된 1994년 말 182개에서 1995년 말 579개, 1996년 말 2054개 순으로 가파르게 증가한다. 인터넷 호스트(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 역시 큰 폭으로 증가해 1993년 말 7,650대였던 호스트가 1994년 말에는 14,681대, 1995년 말에는 38,644대, 1996년 10월에는 67,286대로 증가했다.
이전부터 점점 증가하는 인터넷 사용자에 따른 NIC 업무 증가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던 ANC는 상용인터넷 서비스 개시로 인한 도메인 증가 및 향후 초고속정보통신망에 대한 대비와 기존 학술전산망 뿐 아니라 인터넷 기업체들과의 중립적 조율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KAIST에서 운영하던 KRNIC을 단기적으로 1995년까지 한국전산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94년 9월, KRNIC이 한국전산원에 설치되었다. 한국전산원은 정부 산하의 기구였지만, KRNIC은 별도의 이사회를 두어 재정과 같은 중요한 사항은 이사회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특별한 형태로 운영되었다.[5] 한국전산원의 KRNIC 운영기간은 당초 계획보다 길어져 약 5년 간 한국전산원에서 운영되던 KRNIC은 1999년 독립 법인으로 분리되어 전문적인 기구로서 NIC 기능을 수행했다. 전 세계의 NIC과 같이 KRNIC도 도메인 등록에 따르는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내고 있었는데, KRNIC은 이 수익의 일부를  국내 인터넷의 자율적인 운영을 위한 활동에 사용했다. 이 수익금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인터넷 관련 NGO들이 200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개최된 ICANN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국제적으로는 2003년, 각 언어로 도메인네임을 설정할 수 있는 IDN(Internationalized Domain Name) 국가코드 최상위 도메인 규약이 통과되어 “한글.KR”과 같은 형태의 도메인 네임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북한의 국가 최상위 도메인 .KP가 할당되었다. 이어 2011년에는 IDN이 확장되어 “한국.한국” 형태의 도메인 네임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KRNIC 독립법인은 2004년에 제정된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에 의해 국내 모든 도메인주소의 할당권한이 정부가 지정하는 기구에 위임됨에 따라 역할을 잃고 해체되었다. 처음에는 학술공동체에서 주도하다가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민간부문의 연합에 의해 운영되던 KRNIC은 2004년,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이 제정된 이후 정부의 관할권 아래에서 운영되는 체제로 변화되었다.
각주
[1]  Joint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s, 1986년부터 한국, 일본, 대만에서 매년 1회씩 9회 개최되었으며, 이후 ICOIN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개최되고 있다. https://sites.google.com/site/internethistoryasia/lib/jwcc
[2] IETF RFC-1466.
[3] ANC-92-060. 초기 계획안에는 한국망정보센터의 영문 이니셜이 KNIC으로 표기되었다.
[4] 박태하 인터뷰.
[5] ANC-94-13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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