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쉬에서 날아온 기적같은 소식: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 조약에 합의

마라케쉬(Marrakech), 가본 적은 없지만 귀에 익은 도시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위치한 이 도시는 필자에게는 1994년 세계무역기구 설립 협정이 체결된 곳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적재산권 제도의 세계화 과정에서 분수령으로 꼽히는 트립스 협정(TRIPS: Trade 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무역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도 바로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WTO 협정)의 부속협정 중 하나로 성립되었다.

1994년부터 본격화된 지재권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이에 대한 저항 운동의 세계화를 동반했다. 의약품 접근권 문제를 필두로 전개된 이 운동이 마라케쉬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것은 그래서 의미가 더 깊다. 약 5년 동안 치열한 공방을 벌여온 조약이 이번 주부터 시작된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외교 회의에서 드디어 합의를 본 것이다. 이름하여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에 관한 국제조약”(International Treaty on Limitations and Exceptions for Visually Impaired Persons/Persons with Print Disabiliti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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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저작권 제도 또는 지재권 제도에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을 조약 하나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이 과장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지적재산권 규범이 형성되어 온 국제질서에 비추어보면 이 조약을 “기적”, “역사적” 성과라고 평가할만하다. 지적재산권 뉴스 전문 매체인 IP-Watch는 제목을 “Miracle In Marrakesh: “Historic” Treaty For Visually Impaired Agreed”로 뽑았고 협상장에 있던 세계시각장애인협회 대표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도 이번 결과에 크게 만족한다고 축하를 아끼지 않고 있다.). 저작권 산업계과 이들의 로비를 받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강력한 반대를 뚫고 이루어낸 이 조약은 크게 2가지 면에서 성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저작권 제한을 의무화한 최초의 조약이다. 트립스 협정이나 베른협약(저작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국제조약)과 같은 다자조약이나 FTA와 같은 양자조약 어디에도 저작권의 제한을 의무화한 조항은 없었다. 저작권의 보호와 집행에 관한 조항들은 대부분 의무 조항이었지만, 저작권을 제한하거나 권리 보호에 대한 예외를 두는 조항들은 언제나 “may”로 표현되는 재량 사항에 불과했고, 그동안의 모든 조약들은 이 재량에 한계를 두는 것을 의무화했다[2]. 이번에 합의된 ‘독서장애인 조약’도 3단계 기준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지만, 저작물을 독서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제공하기 위해 저작권(복제권, 배포권, 공중송신권, 공연권)을 반드시 제한하도록 하고, 기술적 조치(저작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채택한 기술적 조치가 독서장애인)에 대한 법적 보호를 완화하도록 의무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둘째,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참여를 통한 투명한 합의 절차이다. 지재권에 관한 가장 최근의 조약인 ACTA(위조품의 거래 방지를 위한 협정)나 FTA의 경우 조약 문안은 공개되지 않고 밀실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독서장애인 조약’은 각국 대표들만 표결권을 갖는 유엔기구(WIPO는 유엔의 특별기구 중 하나다)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시각장애인과 저작권 산업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참관과 발언이 허용되었고, 정부대표간 비공개 회의 결과도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되었다. 그래서 그 동안 줄기차게 반대해왔던 저작권 산업계도 이번 결과를 “균형잡힌(balanced)” 성과라고 평가한다.

‘독서장애인 조약’을 위해 좌절을 모르고 수년 간 노력해온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1] 이 조약은 “시각장애인”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독서장애인”까지 포함한다. “독서장애인”에는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책을 잡거나 다룰 수 없는 사람과 장애의 원인을 불문하고 독서를 위해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정도로 눈의 초점을 맞추거나 눈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포함된다.

[2] 이른바 3단계 기준(three step test)으로 정한 한계인데, 저작권을 제한하려면 (1) 특정한 경우라야 하고, (2) 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과 상충되어서는 안 되며, (3) 저작권자의 정당한 이익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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